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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선비의 집, 명재고택

한국의료재단 공식블로그 2016. 9. 9. 17:00

 

미뤄두었던 휴가를 떠났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바다나 계곡을 피해 고즈넉한 고가에서 하룻밤 묵으며 인근의 향토 음식을 즐길 요량으로 숙박이 제공되는 고택을 검색하다 언뜻 명재고택이 눈에 들어왔다.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두어 시간 남짓 거리에다 도로 사정도 나쁘지 않은 곳이라 선뜻 예약을 했다. 주말을 끼고 출발한 데다 늦은 휴가를 떠나는 차들로 도로는 다소 혼잡했으나 고속도로와 국도를 갈아타며 어렵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나즈막한 산(노성산)아래 네모 형으로 이어진 기와 지붕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곳이 바로 명재고택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노성산 자락, 배산임수 터에 자리잡은 ‘명재고택’

 

나즈막한 노성산 자락 아래 자리잡은 명재고택. 화려하기 보다는 소박하고 선비의 절개가 엿보인다

명재고택 (충남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길 50)은 대표적인 호서지방의 양반가옥으로 조선 중기 상류층의 전형적인 가정집이다. 가옥 남쪽에는 넓고 평평한 외부 공간과 네모난 연못이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풍수지리 상 배산임수(背山臨水)에 따라 연못이 조성된 전통적인 기법이다.

배산임수란 ‘배산(背山)’은 뒤로 산을 등지고 ‘임수(臨水)’는 앞으로 강, 시냇물, 연못 따위의 물을 내려다보거나 물에 닿았다는 뜻으로 산을 음(陰), 물을 양(陽)으로 본 것. 농경생활을 하기에 적합하면서 생태적이고 친환경적인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가옥이 밀집돼 마을이 형성된다.

 

 
안채에 들어서는 대문에 내외벽을 두어 안채가 쉽게 보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은 외부사람들의 접근을 제한해 여자들만의 공간인 안채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으로 안채와 떨어져 독립성을 주면서도 작은 방들을 배치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설계했고 안채와 자연현상(빛, 바람, 빗물 등)을 고려한 과학적이고도 지혜로운 공간을 연출한다. 여기에 채원과 정원 그리고 후원의 장독대는 실용성과 경관성을 고려한 조경미가 돋 보인다. 

안채에 들어서면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내실과 부엌 등이 ‘ㅁ’자로 연결돼 있다 

 

안채 대청마루 뒷 문으로 보이는 후원와 장독대
 

 

안채 대청마루의 여닫이 문. 3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좌우대칭을 이루는 말머리 형상의 원목 문양이 뚜렷하다

 

 

소론 영수, 조선 중기 성리학의 거두 ‘윤증’


명재고택(明齋故宅)은 윤증(尹拯, 1629∽1714) 선생이 1709년에 아들과 제자들이 힘을 합쳐 지은 것이지만 선생은 고택에서 4km 떨어진 유봉에 있는 작은 초가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명재고택의 “고”자를 옛“古”가 아닌 연고“故”자로 쓰고 있다.

또한 명재고택이지만 윤증이 노서(魯西) 윤선거(尹善擧)의 큰아들이었기 때문에 노서종택(魯西宗宅, 魯西)이기도 하다.

윤증(尹拯)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자인(子仁)이며 호는 명재(明齋)다. 유봉(酉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장백(長白)의 딸이다.

 

집안의 최고 어른이 주로 기거하며 외부 손님들을 맞았던 사랑채
 

 


앞 마당과 마을 전경을 볼 수 있는 전각과 사랑채 마루가 연결되어 있다. ‘도원인가’ 무릉도원에 머무르는 집이라는 뜻의 현판이 걸려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그의 스승이기도 한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였고 소론의 수장으로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서도 우의정의 벼슬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백의정승’이라고 불리며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숙종 대에도 호조참의, 대사헌, 우참찬, 좌찬성, 우의정, 판돈녕부사 등의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고 은거하다 1714년 세상을 떠났다.
 

 

사랑채 한 켠에는 전각과 같이 앞마당과 정원을 감상 할 수 있다. 300년 전 와이드 비젼 개념을 알았을까? 문의 폭과 높이를 16:9 비율로 설계했다
 

 

 

사랑채 댓돌 위에는 기이한 형상의 돌을 모아 금강산을 미니어처로 표현 했다. 이른 아침 안개가 낮게 깔리면 금강산에 구름이 걸린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다.

 

 

 

글, 사진  에이빙 김기홍 기자